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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학기 교회...


교수님 안녕하세요.


교수님~ 이 시의 출처는요... 2003/09/30
하선지 님의 글입니다.


샬롬^^*
교수님~ 안녕하세요~
어제 수업을 들은 총신대교육대학원 기독교문화교육전공 하선지입니다~
기억하시죠?^^ 이렇게 처음으로 글을 쓰게 되네요^--^
교수님~어제 수업 중 문교수님실에서 벽에 걸린 시 있잖아요~
그 시의 출처를 찾았어요~^^

교수님~ 늘 성실하게 가르쳐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매주 교수님 시간이 넘 기대가 되요~(아부성?절대 아님ㅋㅋ)
담주엔 휴강이니 다다음주에 뵐수 있네요...
교수님~ 요즈음은 일교차가 넘 커요~ 늘 감기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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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잡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않네.

번뇌도 벗어놓고 욕심도 벗어놓고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이 글은 고려 나옹선사의 글로서 약 7-8년 전 불교계에서 한창 애송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서예하는 이들이라면 한번쯤은 다 써보았음직한 유명한 싯구이다.

내가 즐겨쓰는 한문 행서체에 기본하여, 한글 봉서체를 다소 참고한 서간체로서 국한혼서하기에도 별 무리가 없어 차후 좀더 개발할 예정 아래, 서체를 계속 다듬어가고있는, 말하자면 시험판 서간체인 셈이다.

봉서(封書)란 궁중에서 외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현재 남아있는 대부분은 주로 왕후등이 보낸 편지글이다. 이 편지들은 서사(書寫)를 전담하는 궁인들에 의해 쓰여지기 때문에 그 글꼴이 아름답고 능숙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있다. 봉서는 궁체 흘림에 기본하여 형성된 서간체로서  정교하고 아름답기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이지만, 그 상대 측면인 힘찬 기백의 표출이란 점에서는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서간문이 여러 종 발견되고 있으나, 서예술로서 현대인에게 큰 영향을 줄만한 것은 발견되지않고 있는데.이는 당시 한글이 잘 쓰여지지 아니하여 서체개발이 지지부진하였던 관계로 보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추사의 서간문이 여러 점 보이는데, 상당히 소박하고 거칠며 힘찬 기운은 있으나, 또한 섬세하고 유려한 멋은 부족하여, 봉서체의 잘 다듬어짐과 추사한글의 질박함이 합하여 어우러 진다면 가히 훌륭한 한글 서간체가 이루어 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내가 택한 한글 서간체의 방향은 이러한 점을 고려하였으나, 내가 추사체를 미처 공부하지 못한 관계로, 봉서와 추사체의 결합은 불가능하였으며 대신 봉서와 안진경 행서의 결합을 시도하여 보았다. 여러가지로 시도 중 현재의 방향이 나에게는 가장 적절할 것으로 보여지기 이 서체로 가끔 작품을 시험해보고 있는 것이다.
                                         2002.4.7.

나옹선사(懶翁禪師)  

일명-혜근(惠(慧)勤) (1320~1376) 고려 말의 고승(高僧). 속성 아(牙). 초명 원혜(元慧).
호:나옹(懶翁) 시호:선각(禪覺)  출생지:경북 영해(寧海)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하여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에게서 득도하고,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연경(燕京)의 고려 사찰인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견문을 더욱 넓히기 위해 중국 각지를 편력하며, 특히 평산 처림(平山處林)과 천암 원장(千巖元長)에게서 달마(達磨)로부터 내려오는 중국선(禪)의 영향을 받았다.

고려가 자주국가로서의 면모를 회복하고자 노력할 때, 나옹은 중국에서 선의 기개를 떨치고 1358년(공민왕 7) 귀국, 1361년 왕의 요청으로 신광사(神光寺)에 머물며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사찰을 지켰는데, 그 뒤는 광명사(廣明寺)와 회암사(檜巖寺)에 머물렀다.

1371년 왕사(王師)가 되어 회암사에 있으면서, 1376년(우왕 2) 문수회(文殊會)를 열었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모여들어 대혼란이 일자, 조정에서 밀양(密陽) 영원사(瑩源寺)로 이주하도록 하였는데, 가는 도중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에서 죽었다.


< 자료- 두산대백과에서 >








나옹선사시_청산은_나를_보고.jpg ( 28.9 KB )   download : 60
Eun Ra 감사합니다. 해맑은 미소로 늘 수업에 성실히 임하시는 하선지님을 기억합니다. 이렇게 저를 위해 수고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정말 잊지 않겠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독자들도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월요일에 뵐께요!

2003/09/30 - Delete
하선지 교수님~칭찬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처음모습보다 더 성실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교수님~오늘두 화팅하세요!
샬롬~~^--^

2003/10/02 - Del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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